웨스트 버지니아의 고속도로는 장관이었다. 옅은 안개가 함께한 산등성를 가로지른 고속도로가 어젯밤엔 셀폰 시그널 조차 잡히지 않는 칠흙 속 이었구나. 날씨가 좋고 운전하는 것이 즐거우니 노스캐롤라이나까지의 길은 훨씬 마음이 편했다. 승기형과 종현유원 부부가 안겨준 간식을 하나 둘 까먹다 보니 점심 때를 넘겼고 오후 세시에 드디어 랄리에 도착했다.

 상룡 형과 4년 만에 조우. 상룡 형과는 뭔가 친해질 듯 친해질 듯 하면서도 그냥 어느 덧 연락하기도 힘든 선후배가 되어버렸었다. 2년 전에 랄리에서 좋은 오퍼가 왔을 때 상룡형이 꽤 많은 걸 도와주었는데 그 오퍼를 거절한게 왠지 상룡형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차마 미시간을 택했노라 결국 이야기 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랄리로 가게 되니 참 기구하기도 하다.

 아파트로 걱정을 했는데 상룡형이 그냥 추천한 아파트에 가서 방을 둘러보고 바로 사인을 해버렸다. 혼자 살게 되니 앤아버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내긴 하지만 집은 훨씬 좋다. 프로모션으로 나온 싼 곳 보다 돈을 조금 더 주고 남향을 택했다. 지난 일년간 낮에도 불을 켰던 반지하 같은 곳에서 잘도 살았구나. 난 이제 밝은 곳에서 광명 찾아 살겠다. 하하.

 바로는 이사를 못한다 해서 상룡형집에서 당분간 기생하기로 하였다. 차에 어마어마한 짐을 싣고 다니자니 영 버거워서 빨리 풀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짐을 풀지 못하니 뭔가 마음이 안정이 되지 못하여서 학교는 가야겠는데 뭔가 시작하는 기분이 나지 않는다.

 새 집에는 개강 전 날이 되어서야 입주를 하였다. 유학와서 첫 집은 yongwoo와 john이 있었으니 살림살이가 제법 있었고 두 번째 집은 내 짐이 있었으니 비었다는 느낌이 없었지만 마치 유학을 처음 온 것 마냥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감사해야지. 이곳에서 정말 잘해야지. 앤아버에서 처럼 힘들어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밤에 혼자 예배를 드렸다. 조용하고. 단조롭고. 좋다.

 학교를 둘러보고 스탭들을 만나고 교수를 만나면서 자꾸만 미시간을 비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해서 얼른 미시간을 마음에서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도 나에겐 과분하다. 내 능력으론 어디에서도, 아무것도 못한다. 모든게 감사하고 과분하다. 라고. 스스로 되뇌이고 생각한다.

 난 지금 바닥이다. 라고 생각하고 kaber교수와 첫 미팅을 했다. 개강 전 날 학교에 도착한 박사과정 학생이 이 아저씨도 어이가 없었는지 뭐라 이야기가 길게 진행되지 못하고 어떤 프로젝트에 넣을지 더 이야기 해 보기로 했다. 박사과정 학생인데 아직 자리도 없다. 자리는 바로 줄 줄 알았는데 '아직은'이란다. 이건 운이 없는게 아냐. 나 때문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700대 수업 두 개, 500대 수업 두 개를 듣게 되었다. 수업의 강도는 미시간 보다 조금 약한듯 하다 수업 네 개가 영 부담스럽다. 미시간에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학부생도 아니고 그게 뭐냔다. 괜찮아. 잘 모르는데 빨리 더 배워서 연구하고 좋지 뭐.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업 네 개와 리서치라. 아직 결혼도 안했고 애도 없다. 결혼하면 3학점, 애 낳으면 5학점 추가라는데 난 기혼자보다 8학점이나 덜 듣는 셈 아닌가.

 개강 첫 날 아침부터 여자친구와 싸우고 가면서 아 뭔가 이게 아닌데 생각했지만 삶은 뭔가 시작할 때 활기찬 배경음악이 깔리는 영화와 같지 않다는 걸 이젠 인정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의미 부여를 하고 복선을 깔고 플롯을 만들고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거지!'라고 스스로 너무 많이 만들며 살아왔다. 방글라데시에 갔다와서 2년 만에 장순호 선생님을 미시간에서 뵙고 속으로 한참을 울었다. 꿈을 꾸면서 살기로 했지만 어른이 되고 책임을 질게 많은 이 삶에서 난 꿈꾸며 설레이며 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고 더 성장해야만 한다.

2009/09/10 17:18 2009/09/10 17:18

09.04

여기에/날마다 | 2009/09/04 17:55 | wooram
 점심을 먹으려다 냄비를 엎었고 카펫과 옷이 엉망이 되었다. 한 숟갈이라도 떠 먹고 엎었으면 아쉽지라도 않지.. 하면서 주섬주섬 건더기를 줍고 옷을 갈아입고 카펫 세제를 사러 나갔다.

 아침에 잠이 깨면서부터 여자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마음이 무겁고 첫 팀 미팅은 엉망이 되었다. 미팅 후에 있던 대학원 전체 세미나에 교수가 뭐라 할까 싶어서 눈 안 마주치도록 멀리 있다가 도망 나왔다. 아탑터를 챙겨오지 않아 랩탑을 쓸 수 없게 되자 집에 점심이나 먹으려고 갔지만 기껏 끓은 국냄비를 엎었고 결국 또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 먹었다.

 아 진짜.. 라고 생각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니까.
 
2009/09/04 17:55 2009/09/04 17:55
 디트로이트에 내리고 미국에 온 이후로 가장 가벼운 짐을 들고 세관 검색대를 통과했다. 여느때면 먹을거 하나라도 걸리면 어쩌나 했는데 달랑 캐리어 하나에 책가방 하나뿐이니 검색할 것도 없었다.
 
 종현이와 유원이가 공항에 새 차 알티마를 끌고 나타났다. 이 부부에게 지난 일년간 라이드도 열심히 해주고 때론 아예 차를 열쇠 채로 주곤 했는데 어느덧 새차를 마련해서 라이드 나오니 내가 차 사준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하다. 앤아버로 돌아가는 길에서부터 이 녀석들은 '형 가면 우째요.' 벌써 이러기 시작한다. 야아 그 이야기는 내일 해도 늦지 않아.

 비행기가 생각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차는 결국 손을 못보고 800마일을 운전하게 생겼다. 겉보기엔 이상이 없지만 꽤 오래된 차이니 가기 전에 기도 쎄게 하고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성준이네에 대충 짐을 풀고 이 전 집에 미쳐 다 못가져온 짐을 가지러 갔다. willowtree apartment. 앤아버에서 가장 싼 아파트중 하나 - 너무 후져서 한국인들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 곳에서 왠만하면 안산다는, 그래서 중국인과 인도인이 전체 입주민의 80%가까이 되는 이 아파트에서 1년을 살았다. 내 인생에서 심정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중 하나를 이 곳에서 보냈으니 절대 잊지 못하리라. 박스 두어개를 차에 싣고 전자 레인지와 밥솥은 룸메이트에게 주기로 했다. 나름 형인데 이 녀석에게 해 준게 없어서 뭐 줄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많이 놓고 가기로 했다. 마지막 박스를 차에 싣고 문을 잠그고 나오는데 조금 울컥할 뻔했다. 아냐. 지금 이러면 안돼.

 사람들에게 앤아버에 왔다는 사실도 안 알리고 성준이와 둘이서 소소하게 라면이나 끓여먹기로 했다. 성준이는 앤아버의 마지막 저녁인데 이래도 되냐는데 난 그냥 이러고 싶었다. 떠나는데 의미를 부여하기 싫어 최대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하고 싶었다. 영준이가 용케 내가 온 걸 알고 찾아 왔고 한 달 전에 앤아버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못했던 혜선이가 드레스업한 저녁 약속 복장으로 그대로 나타났다. 고맙다 고마워. 너희들 정말 보고 싶을 거야. 차가 공장에 들어간 해원이네 직접가서 마지막 인사를 했고 승기형네 가서 마지막으로 차를 마셨다. 목사님께는 못 뵙고 갈거라고 말씀드리니 꽤 서운해 하시는 듯 했다.

 아침에 일어나 차에 짐을 실으면서 이게 다 들어갈까 싶었는데 생각했던 짐의 태반을 실어내고는 도와준 성준이와 영준이가 박수를 쳤다. 이 차를 몰고 800마일을 운전해야 한다구.. 하하. 형 노숙자 같아요. 낮 약속이 있던 종현이와 유원이가 급히 성준이 집까지 먹을걸 사들고 왔다. 차에 앉아 시동을 걸고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었다. 유원이는 뭔가 슬프긴 한데 차에 짐 가득 싣고 오빠 가는 모습이 너무 웃겨요. 라고 그랬다. 응. 그래. 나도 안 슬프고 웃겨서 다행이야.

 그동안 못 들은 kosta 강의와 설교들을 mp3 player에 가득 싣고 출발하니 뭔가 은혜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 현진 누나가 코네티컷까지 운전해가면서 kosta설교들을 모두 다시 들었다 한다. 장시간 운전이 기대된다. 오하이오의 풍경은 삭막하고 도로 사정도 안 좋았고 GPS까지 말썽을 일으키면서 결국 콜럼버스 근처에서 길을 헤메고 말았다. 예정은 일곱시간동안 400마일을 가는 것이었는데 일곱시간이 되도록 250마일 밖에 오질 못했다. 맥도날드 간판이 보이자 일단 버거와 콜라를 먹고 운동삼아 좀 걸으며 기도를 했다. 제가 이곳에 가는 것이 맞겠지요. 그러니까 가는 것이지요. 라고 물으면서.

 웨스트 버지니아의 길은 정말 칠흙과도 같았다. 고속도로에 셀폰 시그널 마저 희미해지자 졸리면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통화라도 하리란 계획조차 틀어지고 kosta 설교를 더 집중해가며 들었다. 열두시가 넘어가자 결국 찰스턴 근처의 모텔에서 차를 멈추고 자고 가기로 했다. 아.. 미국에서 40불짜리 모텔이란 이런 곳이구나.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데워서 피로를 풀려고 했는데 따뜻한 물이 잘 안나온다. 카운터에 뭐라 할까 하다가 지금 이 시간에 내가 뭐라 해봤자 저들이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미안해. 이 소리 밖에 없을거 같아 그만 두고 이불을 끌어안고 자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또 400마일을 달려야 하는데 피로가 쌓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비행기에서 내린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닥 힘들지 않다. 많은 생각을 하면 긴장이 풀릴것 같아 간단히 기도를 하고 불을 끄고 이불을 끌어 안았다.


 
2009/09/04 17:37 2009/09/04 17:37

 한국대신  노스캐롤라이나행을 결정한 후 그 늦은 결정의 댓가를 처절히 요 몇 주간 치러야 했다. 많은 희생이 있었고 그 희생(고생)의 근원은 모두 다 나의 늦은 결정과 고민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결국 이렇게 올 걸 뭘 그리 고민했나 싶기도 하다.

 서울을 출발 할 때 어머니의 마음이 안 좋으셨다 한다. 서울은 그 날 비가 많이 내렸고 공항 버스가 늦게 온 덕에 좀 급하게 공항으로 갔다. 난 그냥 덤덤했는데 어머니가 좀 마음이 안 좋으시다 해서 나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앤아버에 도착하면 하루를 자고 바로 랄리로 운전을 해야하는 까닭에 시차와 부족한 잠을 해결해야 했다.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에 도착하여 다섯시간을 대기하는 동안 이번엔 여유로운 대기시간으로 승기형이 준 나머지 엔화로 라면을 사먹었고 한가한 게이트를 찾아 안대까지 하고 누워 두어 시간을 찐하게 자고 디트로이트행 비행기를 탔다.

 마음이 복잡했다. 새로운 곳으로 가는 설레임은 분명 있었지만 떠날 앤아버를 다시 밟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난 그곳을 분명히 그리워 할 것이고 나의 모자람으로 떠난 것에 대해 아쉬워할 것 이다. 하지만 지난 시카고 kosta에서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곳이 어디가 되었건 그건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비행기에서 내내 한비야씨의 새 책을 읽고 또 저널을 쓰고 묵상집을 읽었다. 한비야씨의 책을 읽고 마음이 막 뛰었던 적이 있다. 그 시기에 유학을 결정했고 또 다른 한비야씨의 책은 따뜻했고 새로운 유학생활을 여는 나를 위로했다.

 비행기가 캄차카 반도를 넘어 북태평양을 나는 동안 난 비행기의 창밖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건 더이상 설레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삶을 움직이는 것은 설레임만이 아니라고 분명이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가슴 뛰며 살겠다. 라고 말하는 나 마음의 내 확신의 근원은 이전보다 더욱 분명해졌다.

2009/08/23 18:49 2009/08/23 18:49